패치워크는 코너룸이라는 이름의 전시공간을 열게 되었어요. 완성된 결과물 너머, 창작자의 ‘과정’을 공유하는 작은 방이지요. 이 공간에서 첫 번째로 함께할 사람은, 이하여백 작가인데요. 이번 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직접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동안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간의 작업에서 늘 중요한 주제였던 ‘도시’를 키워드로 삼아 질문을 건넸습니다. 일상과 여행을 이야기하는 이하여백의 삶 속에서 도시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또 도시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방식은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요? 인터뷰 전문에서 그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도시 속 일상을 기록하는 작가,
이하여백의 시작점
사실 일러스트레이터 ‘이하여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디자이너, 문구 제작자, 브랜드 디렉터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계신데요. 얼마 전에 퇴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계속 회사와 병행하며 작업을 해오셨잖아요, 온전히 작업만 하시는 시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요.
네, 맞아요. 온전히 일을 쉰 건 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요. 제가 원래 하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많았다 보니 정리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이번에 홈페이지 정리도 새로 다시 하면서 해왔던 것들을 정리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또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올해까지는 창작자로서 작업을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주로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는데, 담고 싶은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실험해보려고 해요. 페어도 나가고 전시도 참여하고, 책에도 담고요. 그래도 똑같은 걸 하고 싶진 않고, 하는 것에 맞게 그 곳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요.
일종의 탐구기 같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아요. 코너룸에서의 시간이 창작자에게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데, 마침 그런 시기를 보내고 계신 것 같아서 반갑네요. ‘이하여백’에게 ‘창작하는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언제부터 작업을 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은 늘 해오던 것이 자연스럽게 커져가는 개념이라 ‘언제부터’라는 정확한 시점이 없기는 해요. 학생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마켓에도 나가고, 의뢰를 받아서 작업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지도를 진짜 많이 그렸어요. 당시 인스타그램이 등장하고, 하던 걸 아카이빙 해야겠다며 시작했던 거라 처음에는 일상을 기록하던 기록장 같은 거였어요.
‘이하여백’이라는 이름을 쓴 건 2019년 무렵이에요. 제가 부산에서 서울로 오면서부터 그 이름을 썼으니까요. 당시 제가 다녔던 첫 회사에서 매일 쓰는 익숙한 인디자인에서 ‘여백과 도련’이 눈에 들어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공문서에서 아래에 ‘이하여백’의 단어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everyblankspace’로 바꾸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어요. 그게 시작점이라면 시작점이지만, 사실 창작이 거의 제 삶이어서, 그 전에도 ‘하지 않는 상태’였던 적은 없어요. 별 의도 없이 시작했는데 ‘돌아보니 이만큼 쌓였네’에 가까운 것 같네요.


대학교 시절에 작업했던 지도 드로잉들.
사실 ‘이하여백’을 처음 보는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건축을 공부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문과, 이과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어려웠어요. 인문학이나 예술도 좋아하고 수학, 과학도 좋아했거든요. 그러다 대학교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건축학과에 대해 알게 됐어요. 건축은 잘 몰랐는데, 이과이면서 디자인도 하고 역사도 배우고 두 영역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 많았어요. 건축학과는 다른 전공과 다르게 5년제인데요. 처음에는 ‘이게 내 길이 맞나’ 혼란이 있기도 했는데, 4학년쯤 되니까 ‘내가 이걸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이 학문이 너무 좋았거든요.
건축을 공부한 것이 지금의 이하여백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네요.
건축 설계 단계에서 ‘대지분석’이라는 걸 하는데요. 건축물이 들어서는 곳의 맥락, 환경을 살피고 기존의 환경에 녹아들 수 있게 설계하는거죠. 그리고 그걸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설득을 해야 해요. 지금은 제가 건축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작자로서 무언가를 보여줄 때도 ‘그림 그렸으니까 엽서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이건 ‘건축을 공부해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저한테 남은 습관이나 본능 같은 것들이 있어요. 방향을 잘 찾는다거나, 어딘가에 들어갔을 때 구조를 먼저 본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큰 건물 같은 데 보면 비상대피도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거 보는 걸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작가님의 그림에서 평면도를 많이 본 것 같아요.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이네요.
어릴 때도 집에 신문이 오면 그 사이에 광고지 같은 게 껴서 오잖아요. 저는 모델하우스 광고지 보는 걸 엄청 좋아했어요. (웃음) 구조를 보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나봐요. 지금도 제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공간들은 평면도로 그려 놓는 편이에요. 이번에 프랑스로 여행을 갔을 때도 머물렀던 집을 이렇게 기록했고요. 집을 빌려 주었던 지인에게 그 그림을 선물해 주었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자신에게는 뻔한 풍경들인데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어떨지 궁금하다고 말해서 일부러 집 주변의 풍경들을 더 많이 그렸죠. 프랑스에서 제가 그린 그림들을 보니까 구조적이거나 공학적인 그림들에 확실히 많더라고요. (웃음)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집과 주변 풍경을 담은 그림들.
이하여백이 도시와 일상을
바라보는 법
건축과 졸업작품으로 <일상이상>이라는 책을 만드셨어요. 지금 구할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이게 작가님의 첫 출판물이었다고요.
네, 졸업작품 준비할 때 각자 설계할 땅을 고르고 가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든요. 저는 부산에 한옥이 있는 한 생가를 골랐어요. 역사가 남아있는 이 장소의 한옥의 장소성을 살리고 그 주변을 리모델링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이 공간에 머물렀을 때의 경험이 너무 특별했어서, 사람들에게 이 일상 속의 비일상에 대한 경험을 극대화해서 전달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 공간의 동선이 마지막에 이 한옥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계획했어요. 일상의 소중함은 때로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깨닫고 느끼기도 하잖아요. 이 소중함이 무뎌지지 않도록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적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감각을 깨우고 공간을 통해 경험하는 구조를 생각했어요. 건축적인 도면이나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했거든요. 이 이야기를 최대한 담고 싶어서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 책의 형태 또한 포함했어요. 사실은 요즘 이 책을 다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의 생각과도 거의 비슷하거든요. 이때의 주제가 제 삶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건축학과 졸업작품으로 만든 한옥 모형.
<일상에 스며드는 도시>라는 책을 최근에 내셨죠. 계속해서 같은 주제를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은 왜 ‘도시’라는 주제로 일상을 기록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작가님에게 ‘도시’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도 제가 왜 자꾸 ‘도시’라는 단어를 쓰는 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요. 실제로 제가 부산에 살다가 서울에 오면서 삶에서 정말 많은 게 달라졌거든요. ‘도시’는 저에게는 일종의 ‘경유지’ 같은 느낌이에요.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제 인생에 맞닿아 있는 지점이 더 넓어지고, 제 세계가 확장되는 걸 느껴요.
그래서인지 <일상에 스며드는 도시>라는 책을 만들 때도 제목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일반적으로는 도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거니까, 도시 안에 내가 포함되는 개념이잖아요. 근데 저는 반대로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도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서울과 부산에서의 시간을 빼곡히 아카이빙한 이하여백의 에세이집, <일상에 스며드는 도시>
패치워크도 도시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다보니 ‘나’와 ‘도시’의 관계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데요.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계속해서 도시를 이동하면서 그 안에서 변화하는 ‘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인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해요. 도시에 내가 스며드는 게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도시를 어떻게 스며들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흥미로워요.
제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있으면서 스스로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 서울은 저에게는 정말 타지였고, 모르는 것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골목 저 골목 걸어다니면서 점점 익숙해지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곳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요. 도시와 내가 닮아가고, 내가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도시를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다고 느껴요.
집을 짓듯,
자신만의 세계를 건축하는 태도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고유한 세계관이 느껴져요. 내가 발 디디고 선 곳이 어떤 환경인지 관찰하고 조망하려는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건축을 배울 때 대지분석하던 것처럼요. 그렇게 전체 지형도를 파악하고, 주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나만의 중심을 지키며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 같아요. 사실 작가님이 조용히 운영하시는 부계정들이 관심이 많거든요. 그 중에서 ‘@bakedpaperhaus’ 계정에 올리는 작업물을 좋아하는데요. 여기에도 ‘집’이라는 단어가 있고요. 이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대다수의 분들은 모르실 수도 있지만 사실 저는 디자인, 그래픽, 편집을 더 많이 해온 사람이고요. 개인적으로는 디자인 영역에 욕심이 있어요. 저만의 스타일을 더 만들고 싶고요. 아직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시도해 보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요. 그걸 따로 올리거나 노출한 적은 없었던 것 같거든요. ‘이하여백’ 계정에 올리기에는 조금 애매하고요. ‘이렇게 해볼까’, ‘이런 스타일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이런 질감을 적용해볼까’ 이런 생각이 많은데 아직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계속 올리면서 기록하는 거예요.
이 계정의 이름이 ‘@bakedpaperhaus’잖아요. ‘집’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종이’라는 단어도 중요했어요. 저는 종이가 너무 좋아요. 문구 회사에서 일할 때 거래처 사장님에게 ‘저는 문구가 아니라 종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 분이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거다’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아날로그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종이라는 걸 계속 사용하고 있고 저는 그런 관점에서의 접근을 엄청 하고 있거든요.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싶어요.
서체도 직접 만드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전문적으로 폰트 디자인을 하는 건 아니라서 그때 그때 원하는 걸 그려서 만들어보고 있어요. 한국어는 힘들지만, 영문은 알파벳 개수가 많지 않아 만들어두면 조합해서 쓰는 재미가 있거든요. 서체를 만들어보고 싶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가기는 어려워서 조판하듯이 디지털에서 그걸 하고 있네요. (웃음) 모양자 같은 걸로 그려서 스캔을 떠서 만든다든지요.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중요했던 작가님의 여러 주제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이 대화가 전시과정의 시작일 텐데요, 전시과정이 작가님께 어떤 시간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이제껏 다양한 일을 해왔는데요. 그 순간순간마다 저를 알게 된 분들이 그것만으로만 저를 정의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기존과 다른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전시가 건축이라는 키워드를 부각시키는 기회일 것 같기도 하고,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닌 다른 정체성을 더 드러내보이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 같아요. 해왔던 일들을 아우르면서 이하여백으로서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과정을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전시로 보여주면서 사람들이랑 공유하고 싶어요.
코너룸 공간에 와보신 적이 있어서 아실 테지만, 일반적인 갤러리와는 좀 느낌이 달라요. 그 공간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혹시 코너룸에서도 특별히 해보고 싶으신 지점이 있나요?
딱 진입했을 때 좀 더 밀도가 있으면 좋을 것 같고, 방금까지 이 작가가 작업하다 나간 것 같은데 싶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작업실에 초대한 것 같은 전시였으면 좋겠어요. 날것의 메모들이 있고 과정을 보는 식으로요. 단순히 그림을 보기보다 서랍을 꺼내본다든지 하면서 세세한 것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보시는 분들이 뭔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있어도 좋을 것 같고요.
도시적인 측면이나 건축적인 것들이 조금 더 섞였을 때 느낌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트레싱지는 건축 학부생들의 필수템이었거든요. 재료적인 면에서 그런 것을 활용해도 재밌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결국 이 전시가 건축적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작가님이 가진 공간에 대한 시선으로 일상을 어떻게 재해석하는지를 경험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의미있는 졸업설계작품 프로젝트였던 ‘일상이상’처럼 학생 때부터 이미 저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배낭메고 떠났던 세계여행이라는 비일상을 통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달라진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무뎌지기 쉽고, 익숙한 당연한 것들을 낯설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를 배워가고 있어요.
지금도 제가 이어나가고 있는 이야기는 비슷한 결에서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 같아요. 그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해나가는 여러 방법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딘가에 갇혀있거나 정의하지 않고 저의 세계를 앞으로 더 많이 만들어 갈 생각이에요. 이 공간에서 저의 일상을 일부 옮겨올테니, 여러분의 비일상이 되셨으면 좋겠고, 공간을 나서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실 때 새로운 시선과 발견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패치워크는 코너룸이라는 이름의 전시공간을 열게 되었어요. 완성된 결과물 너머, 창작자의 ‘과정’을 공유하는 작은 방이지요. 이 공간에서 첫 번째로 함께할 사람은, 이하여백 작가인데요. 이번 전시를 앞두고 작가와 직접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동안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간의 작업에서 늘 중요한 주제였던 ‘도시’를 키워드로 삼아 질문을 건넸습니다. 일상과 여행을 이야기하는 이하여백의 삶 속에서 도시는 어떤 의미였을까요? 또 도시를 바라보고 기록하는 방식은 삶에 어떤 흔적을 남겼을까요? 인터뷰 전문에서 그 이야기를 만나보세요.
도시 속 일상을 기록하는 작가,
이하여백의 시작점
사실 일러스트레이터 ‘이하여백’이 가장 많이 알려져 있지만 디자이너, 문구 제작자, 브랜드 디렉터 등 다양한 정체성을 가지고 계신데요. 얼마 전에 퇴사를 하셨다고 들었어요. 계속 회사와 병행하며 작업을 해오셨잖아요, 온전히 작업만 하시는 시기는 많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궁금해요.
네, 맞아요. 온전히 일을 쉰 건 학생 때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아요. 제가 원래 하는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많았다 보니 정리를 해보고 싶더라고요. 이번에 홈페이지 정리도 새로 다시 하면서 해왔던 것들을 정리하고 있어요.
내년에는 또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올해까지는 창작자로서 작업을 제대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주로 이야기하는 주제가 있는데, 담고 싶은 이야기를 다양한 형태로 실험해보려고 해요. 페어도 나가고 전시도 참여하고, 책에도 담고요. 그래도 똑같은 걸 하고 싶진 않고, 하는 것에 맞게 그 곳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요.
일종의 탐구기 같은 시간을 보내고 계신 것 같아요. 코너룸에서의 시간이 창작자에게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라는데, 마침 그런 시기를 보내고 계신 것 같아서 반갑네요. ‘이하여백’에게 ‘창작하는 삶’은 포기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언제부터 작업을 해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사실은 늘 해오던 것이 자연스럽게 커져가는 개념이라 ‘언제부터’라는 정확한 시점이 없기는 해요. 학생 때부터 그림을 그리면서 마켓에도 나가고, 의뢰를 받아서 작업도 하고 그랬거든요. 그때는 지도를 진짜 많이 그렸어요. 당시 인스타그램이 등장하고, 하던 걸 아카이빙 해야겠다며 시작했던 거라 처음에는 일상을 기록하던 기록장 같은 거였어요.
‘이하여백’이라는 이름을 쓴 건 2019년 무렵이에요. 제가 부산에서 서울로 오면서부터 그 이름을 썼으니까요. 당시 제가 다녔던 첫 회사에서 매일 쓰는 익숙한 인디자인에서 ‘여백과 도련’이 눈에 들어왔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 공문서에서 아래에 ‘이하여백’의 단어를 보고 ‘이거다’ 싶었어요. 인스타그램 아이디도 ‘@everyblankspace’로 바꾸고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어요. 그게 시작점이라면 시작점이지만, 사실 창작이 거의 제 삶이어서, 그 전에도 ‘하지 않는 상태’였던 적은 없어요. 별 의도 없이 시작했는데 ‘돌아보니 이만큼 쌓였네’에 가까운 것 같네요.
대학교 시절에 작업했던 지도 드로잉들.
사실 ‘이하여백’을 처음 보는 사람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건축을 공부하신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문과, 이과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도 너무 어려웠어요. 인문학이나 예술도 좋아하고 수학, 과학도 좋아했거든요. 그러다 대학교 전공을 선택해야 하는 시점에서 건축학과에 대해 알게 됐어요. 건축은 잘 몰랐는데, 이과이면서 디자인도 하고 역사도 배우고 두 영역이 맞닿아 있는 지점이 많았어요. 건축학과는 다른 전공과 다르게 5년제인데요. 처음에는 ‘이게 내 길이 맞나’ 혼란이 있기도 했는데, 4학년쯤 되니까 ‘내가 이걸 업으로 삼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이 학문이 너무 좋았거든요.
건축을 공부한 것이 지금의 이하여백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하네요.
건축 설계 단계에서 ‘대지분석’이라는 걸 하는데요. 건축물이 들어서는 곳의 맥락, 환경을 살피고 기존의 환경에 녹아들 수 있게 설계하는거죠. 그리고 그걸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설득을 해야 해요. 지금은 제가 건축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작자로서 무언가를 보여줄 때도 ‘그림 그렸으니까 엽서 만들어야겠다’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는 편이에요.
그리고 이건 ‘건축을 공부해서’는 아닐 수도 있지만 저한테 남은 습관이나 본능 같은 것들이 있어요. 방향을 잘 찾는다거나, 어딘가에 들어갔을 때 구조를 먼저 본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큰 건물 같은 데 보면 비상대피도 같은 게 있거든요. 그런 거 보는 걸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작가님의 그림에서 평면도를 많이 본 것 같아요.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제 보이네요.
어릴 때도 집에 신문이 오면 그 사이에 광고지 같은 게 껴서 오잖아요. 저는 모델하우스 광고지 보는 걸 엄청 좋아했어요. (웃음) 구조를 보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나봐요. 지금도 제가 오래 기억하고 싶은 공간들은 평면도로 그려 놓는 편이에요. 이번에 프랑스로 여행을 갔을 때도 머물렀던 집을 이렇게 기록했고요. 집을 빌려 주었던 지인에게 그 그림을 선물해 주었더니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자신에게는 뻔한 풍경들인데 새롭게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은 어떨지 궁금하다고 말해서 일부러 집 주변의 풍경들을 더 많이 그렸죠. 프랑스에서 제가 그린 그림들을 보니까 구조적이거나 공학적인 그림들에 확실히 많더라고요. (웃음)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집과 주변 풍경을 담은 그림들.
이하여백이 도시와 일상을
바라보는 법
건축과 졸업작품으로 <일상이상>이라는 책을 만드셨어요. 지금 구할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이게 작가님의 첫 출판물이었다고요.
네, 졸업작품 준비할 때 각자 설계할 땅을 고르고 가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거든요. 저는 부산에 한옥이 있는 한 생가를 골랐어요. 역사가 남아있는 이 장소의 한옥의 장소성을 살리고 그 주변을 리모델링하고 싶었어요. 실제로 이 공간에 머물렀을 때의 경험이 너무 특별했어서, 사람들에게 이 일상 속의 비일상에 대한 경험을 극대화해서 전달하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 공간의 동선이 마지막에 이 한옥을 통해 빠져나갈 수 있도록 계획했어요. 일상의 소중함은 때로 비일상적 경험을 통해 깨닫고 느끼기도 하잖아요. 이 소중함이 무뎌지지 않도록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일상적 투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일상을 새롭게 보게 하는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었어요. 감각을 깨우고 공간을 통해 경험하는 구조를 생각했어요. 건축적인 도면이나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지만, 이 프로젝트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했거든요. 이 이야기를 최대한 담고 싶어서 프로젝트를 계획할 때 책의 형태 또한 포함했어요. 사실은 요즘 이 책을 다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지금의 생각과도 거의 비슷하거든요. 이때의 주제가 제 삶에 있어 여전히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건축학과 졸업작품으로 만든 한옥 모형.
<일상에 스며드는 도시>라는 책을 최근에 내셨죠. 계속해서 같은 주제를 이어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작가님은 왜 ‘도시’라는 주제로 일상을 기록하고 있는지 궁금해요. 작가님에게 ‘도시’란 어떤 의미인가요?
저도 제가 왜 자꾸 ‘도시’라는 단어를 쓰는 지에 대해 생각해봤는데요. 실제로 제가 부산에 살다가 서울에 오면서 삶에서 정말 많은 게 달라졌거든요. ‘도시’는 저에게는 일종의 ‘경유지’ 같은 느낌이에요.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제 인생에 맞닿아 있는 지점이 더 넓어지고, 제 세계가 확장되는 걸 느껴요.
그래서인지 <일상에 스며드는 도시>라는 책을 만들 때도 제목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실 일반적으로는 도시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거니까, 도시 안에 내가 포함되는 개념이잖아요. 근데 저는 반대로 하고 싶었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도시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서울과 부산에서의 시간을 빼곡히 아카이빙한 이하여백의 에세이집, <일상에 스며드는 도시>
패치워크도 도시문화 콘텐츠를 만드는 일을 하다보니 ‘나’와 ‘도시’의 관계에 대해 자주 고민하는데요. 작가님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계속해서 도시를 이동하면서 그 안에서 변화하는 ‘나’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인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해요. 도시에 내가 스며드는 게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도시를 어떻게 스며들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흥미로워요.
제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있으면서 스스로 많이 바뀌었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익숙해졌지만 처음에 서울은 저에게는 정말 타지였고, 모르는 것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 골목 저 골목 걸어다니면서 점점 익숙해지는 게 너무 좋은 거예요. 내가 살아가는 곳을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요. 도시와 내가 닮아가고, 내가 도시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도시를 내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 같다고 느껴요.
집을 짓듯,
자신만의 세계를 건축하는 태도
작가님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고유한 세계관이 느껴져요. 내가 발 디디고 선 곳이 어떤 환경인지 관찰하고 조망하려는 태도가 있는 것 같아요. 건축을 배울 때 대지분석하던 것처럼요. 그렇게 전체 지형도를 파악하고, 주변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그 맥락을 이해하면서도 나만의 중심을 지키며 집을 짓고자 하는 사람 같아요. 사실 작가님이 조용히 운영하시는 부계정들이 관심이 많거든요. 그 중에서 ‘@bakedpaperhaus’ 계정에 올리는 작업물을 좋아하는데요. 여기에도 ‘집’이라는 단어가 있고요. 이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 같아요.
대다수의 분들은 모르실 수도 있지만 사실 저는 디자인, 그래픽, 편집을 더 많이 해온 사람이고요. 개인적으로는 디자인 영역에 욕심이 있어요. 저만의 스타일을 더 만들고 싶고요. 아직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계속 시도해 보고 있는 것들이 많은데요. 그걸 따로 올리거나 노출한 적은 없었던 것 같거든요. ‘이하여백’ 계정에 올리기에는 조금 애매하고요. ‘이렇게 해볼까’, ‘이런 스타일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이런 질감을 적용해볼까’ 이런 생각이 많은데 아직 만들어가는 과정이니까 계속 올리면서 기록하는 거예요.
이 계정의 이름이 ‘@bakedpaperhaus’잖아요. ‘집’이라는 단어도 있지만 ‘종이’라는 단어도 중요했어요. 저는 종이가 너무 좋아요. 문구 회사에서 일할 때 거래처 사장님에게 ‘저는 문구가 아니라 종이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그 분이 ‘그 마음이 변하지 않으면 진짜 잘할 수 있을 거다’라고 조언을 해주셨어요. 아날로그가 사라져가는 시대에, 종이라는 걸 계속 사용하고 있고 저는 그런 관점에서의 접근을 엄청 하고 있거든요. 나름의 방식으로 발전시키고 싶어요.
서체도 직접 만드시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저는 전문적으로 폰트 디자인을 하는 건 아니라서 그때 그때 원하는 걸 그려서 만들어보고 있어요. 한국어는 힘들지만, 영문은 알파벳 개수가 많지 않아 만들어두면 조합해서 쓰는 재미가 있거든요. 서체를 만들어보고 싶기는 한데 그렇게까지 가기는 어려워서 조판하듯이 디지털에서 그걸 하고 있네요. (웃음) 모양자 같은 걸로 그려서 스캔을 떠서 만든다든지요.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드러나지 않았지만 중요했던 작가님의 여러 주제에 대해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 같아요. 이 대화가 전시과정의 시작일 텐데요, 전시과정이 작가님께 어떤 시간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참여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이제껏 다양한 일을 해왔는데요. 그 순간순간마다 저를 알게 된 분들이 그것만으로만 저를 정의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기존과 다른 새로운 걸 보여주고 싶어요. 그래서 이번 전시가 건축이라는 키워드를 부각시키는 기회일 것 같기도 하고, 일러스트레이터가 아닌 다른 정체성을 더 드러내보이는 새로운 기회가 될 것 같아요. 해왔던 일들을 아우르면서 이하여백으로서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이 될 것 같아요. 그런데 그 과정을 혼자서 하는게 아니라 전시로 보여주면서 사람들이랑 공유하고 싶어요.
코너룸 공간에 와보신 적이 있어서 아실 테지만, 일반적인 갤러리와는 좀 느낌이 달라요. 그 공간에서만 보여줄 수 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혹시 코너룸에서도 특별히 해보고 싶으신 지점이 있나요?
딱 진입했을 때 좀 더 밀도가 있으면 좋을 것 같고, 방금까지 이 작가가 작업하다 나간 것 같은데 싶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작업실에 초대한 것 같은 전시였으면 좋겠어요. 날것의 메모들이 있고 과정을 보는 식으로요. 단순히 그림을 보기보다 서랍을 꺼내본다든지 하면서 세세한 것을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보시는 분들이 뭔가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있어도 좋을 것 같고요.
도시적인 측면이나 건축적인 것들이 조금 더 섞였을 때 느낌도 재미있을 것 같아서 그런 것도 생각해보고 있어요. 트레싱지는 건축 학부생들의 필수템이었거든요. 재료적인 면에서 그런 것을 활용해도 재밌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결국 이 전시가 건축적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작가님이 가진 공간에 대한 시선으로 일상을 어떻게 재해석하는지를 경험해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 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의미있는 졸업설계작품 프로젝트였던 ‘일상이상’처럼 학생 때부터 이미 저는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그 당시에 배낭메고 떠났던 세계여행이라는 비일상을 통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달라진 것들이 너무 많았거든요. 무뎌지기 쉽고, 익숙한 당연한 것들을 낯설고 감사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태도를 배워가고 있어요.
지금도 제가 이어나가고 있는 이야기는 비슷한 결에서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것 같아요. 그것들을 기록하고 기억해나가는 여러 방법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어딘가에 갇혀있거나 정의하지 않고 저의 세계를 앞으로 더 많이 만들어 갈 생각이에요. 이 공간에서 저의 일상을 일부 옮겨올테니, 여러분의 비일상이 되셨으면 좋겠고, 공간을 나서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실 때 새로운 시선과 발견이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