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➊
개항기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 & 3.1운동의 발상지
배다리의 역사는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시작됐다. 당시 항구 일대에 외국인들의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서민들은 가까운 배다리와 주변 동네로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지금과 달리 밀물 때면 바닷물이 들어와 작은 배를 댈 수 있던 배다리에는 조선인 시장과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경인선 철도가 인근에 부설되고, 선교사 숙소와 공장, 양조장 등이 생겨나면서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1919년에는 인천 지역 최초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 내내 배다리는 인천 지역 시민-노동 운동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이혜숙 (헌책방 삼성서림 운영자)
저희 어머니가 1930년대 중반쯤 경상도에서 인천으로 이주하셨어요. 어머니에게 들었는데, 당시에는 비행기도 없어서 바다를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오게 되니까 인천이 중요한 관문이었던 거예요. 일본, 중국, 서양인들을 비롯한 다양한 외국인들이 많이 섞여 있었대요. 서양 문물이 빠르게 들어오면서 교회도 일찍 세워졌고요. 외국 사람들과 외국 문물이 활발하게 오가는 동네였다고 해요.

1948년, 어느 미군 부부가 촬영한 인천 배다리의 풍경
장면 ❷
40여 개 헌책방과 큰 시장이 섰던 인천 원도심
일제강점기부터 흥성하던 배다리 주변 시장에는 해방 이후 헌책방이 하나둘 생겨났다.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두고 간 책을 상인들이 모아 손수레나 가마니에 깔아놓고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집현전과 한미서점은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0년대 초 문을 열었고, 1970년대에는 무려 40여 개가 넘는 헌책방들이 성업했다. 배다리의 상징과도 같은 헌책방거리는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후 구월동과 송도신도시 등 신도심 개발 계획이 이어지면서 원도심 배다리를 찾는 이들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마을과 상권에는 인적이 드물게 되었다.
곽현숙 (헌책방 아벨서점 운영자)
책방을 열던 1970년대 때까지만 해도 배다리에는 중앙시장이라는 커다란 시장이 있었어요. 쌀 도매상도 많고 각종 수공업체랑 헌책방까지, 사람들 발길이 끊이질 않았죠. 그러다 전철이 1974년에 처음 생겼거든요. 원래는 기차가 하루에 네다섯 번 밖에 안 다녔는데, 경인선 전철이 생기면서 이제 매 분마다 다니는 거죠. 도서지방에서 다 인천으로 와서 물건을 샀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예요. 그 이후에 주거단지도 생기고, 인천이 점점 넓어지면서 배다리를 찾던 사람들이 줄어들게 되었죠.
이철완 (초록한의원 원장)
저는 1956년도에 배다리에서 태어났어요. 당시에는 신포동 쪽에 외국 사람들이 많이 살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쪽으로 많이 몰렸어요. 사람들이 정말 엄청 많았어요. 그렇게 모이니까 그 사람들이 필요한 물자를 만드는 모든 공장이 다 있었겠죠. 학교도 많이 생겨났죠.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필요한 것들이 하나둘씩 생겨난 거예요.
권근영 (15분연극제 프로듀서)
중학생 때 교과서를 잃어버렸어요. 눈앞이 캄캄하고 겁부터 났는데, 아빠가 배다리 헌책방에 가면 없는 책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진짜였어요. 교과서를 사고, 학년 마칠 때 다시 팔고, 그 돈으로 떡볶이 사 먹고 그랬어요. 한 번은 대학교 친구들이 인천에 놀러 오고 싶다고 해서, 배다리에서부터 신포동, 자유공원까지 코스를 짠 적이 있어요. 아벨서점에서 귀한 책들을 발견하고 신나 하던 친구들 얼굴이 생각나요. 그때의 기억 때문에 자꾸만 친구들을 인천에 초대하고 싶은 것도 같아요.
장면 ❸
주민들의 힘으로 산업도로 건설 계획을 바꿔낸 곳
2006년, 배다리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인천광역시가 배다리 마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건설을 추진한 것이다. 반세기에 걸친 마을의 생활문화는 일순간 단절될 위기에 처했고, 주민들과 지역 시민단체들은 각각 협의체를 구성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예술가들과 문화기획자들은 역으로 배다리 마을 곳곳에 정착하여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지역의 유산과 가치를 전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모색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이렇듯 꾸준하게 이어진 산업도로 반대 운동의 결과 인천광역시는 2019년 도로를 지하화하여 개통하는 방향으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민운기 (스페이스 빔 대표)
2007년에 도시유목이라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배다리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당시 배다리는 다소 휑한 느낌이었는데요. 산업도로 계획을 발표하고 도로를 내기 위해 집들을 다 철거했던 거죠. 마을의 역사적인 가치를 주장하면서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크게 힘을 얻지 못하는 상황이었어요. 처음엔 이런 상황을 몰랐는데, 머무르면서 문제를 알게 되었던 거죠. 그 이후 지역사회에 이 사안을 적극적으로 알리기 시작했어요. 성명서를 작성하고 문화단체에 공유하기도 하고요. 그 후 산업도로를 반대하는 움직임이 점점 커졌습니다. 배다리를 거점 삼아 활동을 이어가고자, 기존에 인천 구월동에 있던 스페이스빔을 배다리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상봉 (사진공간 배다리 관장, 헌책방 집현전 운영자)
2000년대 초반에는 아이들을 위한 책을 사러 많이 왔어요. 제가 교직에 있었거든요. 그리고 사진을 했기 때문에 좋은 사진집을 찾으러도 많이 왔죠. 그러다 갤러리를 하고 싶은 생각이 커져서 2012년에 아벨서점 사장님의 도움으로 인천 최초의 사진 갤러리 ‘사진공간 배다리’를 오픈했어요. 사진가들과 많은 작업을 했죠. 그때 너무 재미났던 게 이 거리 전체가 모임터였어요. 우리끼리 이 거리에 여기저기 식탁을 깔아서 막걸리 파티를 하기도 하고 건물에 흰 천을 걸어놓고 프로젝터를 쏴서 우리의 활동을 보여주기도 하고요. 다들 그때 생각하면 너무 행복해해요.
장면 ❹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 곳
2020년을 전후로 마을 전체가 소란했던 시기를 지나 차츰 안정세를 찾아 가면서 배다리에는 새로운 문화-예술 관련 주체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역사/문화/생태 기반의 마을 만들기 활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인천 동구의 문화예술의 거리 조성사업을 계기로 공간운솔, 패치워크, 인천 스펙타클 등 젊은 문화기획자와 예술가들이 배다리에 정착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역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바탕으로 마을의 자산과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색다른 콘텐츠를 제안하고 있다.
이종범 (인천 스펙타클 대표)
2021년은 동양가배관이나 공간운솔처럼 새로운 공간들이 막 생겨나던 시기였어요. 그전까지 활동을 이어오시던 분들과 공존하면서도, 새롭게 등장한 분들이 분위기를 바꿔나가던 때였던 것 같아요. 배다리는 인천 안에서도 문화적으로 재미있는 색채가 짙은 동네라고 생각했죠.
곽은비 (로컬 아키비스트)
예전에는 마을이 활발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개인의 공간이나 사무실처럼 쓰이다 보니 닫힌 곳처럼 느껴졌거든요. 요즘에는 다시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는 것 같아요. 처음 오는 사람들도 따뜻하게 느끼는 마을이 되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글 | 강필호
코멘터리 인터뷰 | 김한별
장면 ➊
개항기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마을 & 3.1운동의 발상지
배다리의 역사는 1883년 인천의 개항과 함께 시작됐다. 당시 항구 일대에 외국인들의 조계지가 형성되면서 서민들은 가까운 배다리와 주변 동네로 밀려났고, 그 과정에서 지금과 달리 밀물 때면 바닷물이 들어와 작은 배를 댈 수 있던 배다리에는 조선인 시장과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경인선 철도가 인근에 부설되고, 선교사 숙소와 공장, 양조장 등이 생겨나면서 마을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1919년에는 인천 지역 최초로 인천공립보통학교(현 창영초등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 내내 배다리는 인천 지역 시민-노동 운동의 중심지로서 기능하기도 했다.
1948년, 어느 미군 부부가 촬영한 인천 배다리의 풍경
장면 ❷
40여 개 헌책방과 큰 시장이 섰던 인천 원도심
일제강점기부터 흥성하던 배다리 주변 시장에는 해방 이후 헌책방이 하나둘 생겨났다. 인근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책, 한국전쟁 당시 피난민들이 두고 간 책을 상인들이 모아 손수레나 가마니에 깔아놓고 판매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집현전과 한미서점은 한국전쟁 직후였던 1950년대 초 문을 열었고, 1970년대에는 무려 40여 개가 넘는 헌책방들이 성업했다. 배다리의 상징과도 같은 헌책방거리는 바로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하지만 이후 구월동과 송도신도시 등 신도심 개발 계획이 이어지면서 원도심 배다리를 찾는 이들이 급격히 줄어들었고, 마을과 상권에는 인적이 드물게 되었다.
장면 ❸
주민들의 힘으로 산업도로 건설 계획을 바꿔낸 곳
2006년, 배다리에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인천광역시가 배다리 마을을 관통하는 산업도로 건설을 추진한 것이다. 반세기에 걸친 마을의 생활문화는 일순간 단절될 위기에 처했고, 주민들과 지역 시민단체들은 각각 협의체를 구성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예술가들과 문화기획자들은 역으로 배다리 마을 곳곳에 정착하여 문화-예술 활동을 통해 지역의 유산과 가치를 전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모색하는 활동에 전념했다. 이렇듯 꾸준하게 이어진 산업도로 반대 운동의 결과 인천광역시는 2019년 도로를 지하화하여 개통하는 방향으로 사태를 일단락 지었다.
장면 ❹
한적하고 조용하지만, 자기만의 세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은 곳
2020년을 전후로 마을 전체가 소란했던 시기를 지나 차츰 안정세를 찾아 가면서 배다리에는 새로운 문화-예술 관련 주체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기존의 역사/문화/생태 기반의 마을 만들기 활동이 이어지는 가운데 인천 동구의 문화예술의 거리 조성사업을 계기로 공간운솔, 패치워크, 인천 스펙타클 등 젊은 문화기획자와 예술가들이 배다리에 정착한 것이다. 이들은 모두 지역에 대한 존중과 애정을 바탕으로 마을의 자산과 이야기를 재해석하여 색다른 콘텐츠를 제안하고 있다.
글 | 강필호
코멘터리 인터뷰 | 김한별